리필샵을 위한 규제 완화 – 지금 당장, 리필하기 위하여

“규제를 완화하면, 지구를 살릴 수 있다.”

환경을 보호하려면 규제를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 통념이다. 그러나 오히려 규제를 완화하면 할수록 지구와 환경을 보호하는 분야가 있다. ESG 바람과 맞물려 트렌드로 자리잡은 ‘리필샵(Refill Shop, 이하 영문명 생략)’ 분야이다.

리필샵이 뭐지?!

리필샵은 이용자가 스스로 용기를 가져오면, 대용량(벌크) 제품의 내용물을 이용자가 가져온 용기에 소분하여 판매하는 새로운 형태의 샵이다. 주로 가게 한 켠에 큰 통을 두고, 이용자가 소분하여 가져가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이 때문에 일종의 ‘친환경 뷔페’로 불린다. 리필샵은 쓰레기를 배출하지 않고, 부득이하게 발생한 잉여자원을 순환하여 낭비 없는 생활을 누리자는 ‘제로 웨이스트(Zero Waste)’ 정신에서 출발했다.

샴푸나 린스를 살 때마다 나오는 플라스틱 통에는 스프링이 달려있어, 그 자체로는 재활용이 어렵다. 리필샵은 이런 문제점을 고려하여, 고객이 사용한 통에 내용물을 담아 재활용할 수 있게 하는 방식으로 제로 웨이스트를 실현한다. 유통 부담이 낮아은 편이라, 가게는 시판용 제품보다 저렴한 가격에 용품을 판매할 수 있다. 환경보호뿐만 아니라 물가 안정에도 기여하는 셈이다.

리필샵 사업 등록을 위한 절차

이렇게 좋은 취지를 가지고 있는 리필샵이지만, 한국에서 리필샵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단순 도소매업 외에 추가적인 사업자등록이 필요하다. 이미 운영 중인 매장에서 리필코너를 신설하는 경우도 다르지 않다. 더욱이 ‘리필하는 품목별’로 별도의 업종 신고나 등록을 따로 받아야 한다.

예컨대 코너 종류별로 등록 업종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코너 종류등록 업종
세제, 섬유유연제 리필도소매업 + 기술원 신고
샴푸, 린스 리필화장품 소분판매업
비건 간식 리필식품 소분판매업 및 즉석판매제조가공업

세제나 섬유유연제의 경우 리필샵 운영이 상대적으로 용이하다. 이들은 화학제품안전법상 ‘안전확인대상 생활화학제품’에 해당하는데, 한국환경산업기술원 내 담당 홈페이지인 화학제품관리시스템에 신고하는 것만으로 소분 및 리필 사업을 운영할 수 있기 때문이다. 1그러나 샴푸와 린스처럼 화장품 리필샵을 운영한다면 허들이 보다 높아진다. ‘맞춤형화장품조제관리사’라는 자격증을 구비하여야 등록을 진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맞춤법화장품판매업의 신고시 지방식품의약품안전청장에게 제출해야 하는 서류
① 맞춤형화장품판매업 신고서(「화장품법 시행규칙」 별지 제6호의2서식)
② 맞춤형화장품조제관리사의 자격증 사본
③ 법인등기사항증명서 (법인의 경우)
④ 건축물관리대장
⑤ 임대차계약서 (임대차에 한함)
⑥ 혼합∙소분의 장소∙시설 등을 확인할 수 있는 세부 평면도 및 상세 사진
*화장품법 제3조의2, 동법 시행령 제8조의2 근거

샴푸∙린스∙스킨∙로션 등 화장품의 리필은 화장품법상 ‘맞춤형화장품판매업(소분판매업)’에 해당한다. 맞춤형화장품판매업은 2018년 신설되었다. 고객맞춤형 화장품의 수요가 높아지며, 개별 소비자의 특성에 맞춘 화장품의 조제를 합법화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동시에 화장품법은 맞춤형화장품 조제의 전문성, 안전성 제고를 위해 본 업종에 종사하고자 하는 자에게 ‘맞춤형화장품 조제관리사’라는 자격증을 갖출 것을 요구했다(화장품법 제3조의2).

샴푸 리필이 이렇게 어려울 일이야?

문제는 여기서 시작된다. 단순히 물품을 나누는 소분판매업 역시 제조∙혼합판매업과 함께 맞춤형화장품판매업에 포함되면서, 벌크 제품에서 직접 내용물을 몇 번 덜어내는 것뿐인 리필 코너 역시 조제관리사 자격증을 취득해야만 운영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맞춤형화장품조제관리사시험의 역대 총 합격률은 18%2로, 상당한 난이도를 가진다. 해당 자격증은 보통 화장품연구원에 취업하고자 하는 관련 학과 출신이 준비한다는 점에서, 기존 리필샵을 운영하면서 혹은 스타트업을 시작하면서 취득하기에는 어려움이 많다. 관련 사업을 하려면 결국 단순한 소분판매만을 위해 ‘맞춤형화장품조제관리사’를 먼저 구해야 하는 것이다.

설령 자격증을 가진 동업자를 구했더라도 고민이 없는 것은 아니다. 현 식약처 지침은 ‘영업 지점당 조제관리사가 상근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어렵게 자격증을 취득해 스타트업을 시작했다고 해도, 가맹점을 내기 위해서는 해당 지점에 상근직 조제관리사 한 명을 두어야 한다. 대한민국 땅에서 리필샵이 뿌리내리기 힘든 가장 큰 이유이다.

그런데 현재 운영하고 있는 리필샵들은 맞춤형화장품 조제관리사가 상근하지 않는다. 이들은 2021년 9월 시범사업으로 지정되어 샌드박스 승인을 받은 곳들이다. 알맹상점, 카페이공, 보탬상점, 이니스프리의 각 일부 지점은 샴푸, 린스, 바디클렌져, 액체비누 등 총 4개의 품목에 한정해 조제관리사 없이도 소분판매(리필)를 할 수 있도록 규제특례를 승인받았다.

규제 샌드박스, 완성이 아닌 시작

리필샵의 필요성과 중요성이 ESG 열풍에 따라 강조되고, 그 수요 역시 높아지면서, ‘화장품판매업’의 소관부처인 식품의약품안전처와 샌드박스 지원센터는 2021년 9월 일부 기업에 샌드박스 규제실증특례를 승인하였다.

대상 기업알맹상점 망원점, 서울역점, 카페이공, 보탬상점 등 총 7곳
특례 내용판매장 내에서 조제관리사의 관리 감독 하에 교육∙훈련 받은 직원이 직접 소분(리필)할 수 있도록 함
허용 품목샴푸, 린스, 바디클렌져, 액체 비누 (총 4종)

해당 샌드박스 승인이 확정된 이후, 규제로 인해 어려움이 가중되었던 리필샵 운영에 활로가 생길 것으로 기대되었다. 실제로 실증특례 이후 관계부처가 해당 사안의 규제 개혁을 검토하기 시작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왔다. 하지만 리필샵에 대한 규제 완화 논의는 몇몇 판매점의 샌드박스 승인특례 이후 공전하고 있다. 종국적 규제 완화가 아닌 일시적 승인특례는 새롭게 리필샵에 진입하려는 혁신가들에게는 여전히 크나큰 진입규제로 다가온다.

승인특례는 완전한 규제 개혁이 아니다. 샌드박스 등록으로 인해 모든 이들에게 규제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리필샵 규제 개혁의 ‘완성’을 목표로, 현 샌드박스 시범사업의 효과와 난점을 짚어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이를 위해 한국에서 리필샵 문화를 만들고, 제로 웨이스트 문화를 이끌고 있는 ‘알맹상점’)의 입장을 들어보았다.

“조제관리사가 없어도 충분하다.”

리필샵 중 한 곳인 알맹상점의 양래교 공동대표는 이렇게 단언했다. “소분작업은 조제관리사가 아니더라도 교육을 받은 직원으로 충분히 대체 진행이 가능하다.”

본 규제샌드박스의 특징 중 하나는 맞춤형화장품 조제관리사가 상주하지 않는 리필샵 운영을 가능하게 한 것이다. 화장품법상3 리필샵 운영 시 상근 조제관리사가 직접 화장품을 소분하여 제공하여야 한다는 제한은 이미 살펴보았다. 승인특례는 이를 완화하여, 조제관리사의 관리∙감독이 있다면 교육∙훈련받은 직원이 직접 소분할 수 있도록 하였다. 실제로 시범사업에 선정된 알맹상점 망원점에서는 조제관리사와 더불어 그로부터 교육 및 훈련을 받은 타 직원도 소분 작업을 할 수 있다.

실제 리필샵 운영형태를 보아도, 소비자가 가져온 리필 용기의 오염 여부를 확인하고, 펌프나 노즐 등 주입구를 관리하며, 소비자에게 유의사항을 안내해주는 것은 위생사에 준하는 교육을 받은 직원이 행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알맹상점을 비롯한 리필샵들은, 진정한 리필샵 활성화를 위해서는 ‘업종 등록’시 판매점마다 조제관리사를 두도록 하는 규정이 완화되어야 한다고 한 목소리를 냈다.

이미 시범사업을 통해, 조제관리사에게 교육∙훈련을 받은 직원으로 리필샵을 운영하게 해도 현실적인 문제가 없다는 점이 드러났다는 것이다. 지금처럼 위생 및 안전 가이드라인을 세부적으로 마련하기만 한다면 등록 시에 있어 조제관리사를 필요로 하지 않도록 규제를 충분히 완화하는 것을 검토할 수 있다.

“샴푸나 린스를 화장품이라고 하기엔…”

해당 샌드박스의 또 다른 특징은 적용 품목이 샴푸, 린스, 바디 클렌져, 액체 비누로 한정되어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조제관리사 자격증을 취득한 대표가 상주하는 알맹상점 합정점의 경우 취급하는 화장품에 제한이 없지만, 그렇지 않은 서울역점의 경우 시범사업에서 규정한 네 가지 품목밖에 취급하지 못한다.

양 대표는 서울역점의 품목 제한으로 인해 이용자들의 불편이 크냐는 질문에 “화장품이라고 하면 샴푸나 린스보다는 얼굴 로션이나 크림을 생각하잖아요. 그러다 보니 아쉬움을 뒤로한 채 다시 돌아가시는 손님들도 많은 상태입니다.”라고 답했다.

리필샵을 찾는 소비자의 입장에서는 조제관리사나, 자격증 없이 단순 교육을 받은 직원이나 유의사항을 친절히 알려준다는 점에서 다를 바가 없다. 이처럼 이용방법의 차이가 없음에도, 지점에 따라서 로션이나 폼 클렌징 등의 화장품은 리필할 수 없다는 점을 선뜻 이해하기 힘들다는 게 리필샵 업계의 공통적인 지적이다. 만약 화장품 리필이 소비자 안전성에 우려된다는 이유로 시범사업을 선정한 것이라면, 피부에 직접 바르는 화장품 역시 허용 품목에 포함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한편, 해외는 앞서 살펴본 국내 규제와는 다른 양상을 띤다.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리필샵인 ‘Negozio Leggro’는 시판되는 화장품 제품을 넘어, 화장품 재료를 소분해서 판매하기도 한다. 이외의 독일, 태국 리필 스테이션에서도 화장품을 리필 판매함에 있어 법상 큰 제한이 없다.

이 때문에 이미 제조 단계에서 안전성 검사를 통과한 벌크 제품을 소분판매 함에 있어 지나친 제한을 가하는 국내 법규가 부적절하다는 비판이 커지고 있다. 특히 과다포장, 소량판매가 많은 로션이나 크림의 특성상, 리필 시 얻게 되는 플라스틱 폐기물 저감 효과는 샴푸나 린스와 같은 대용량 제품보다 더 클 것이라는 점에서 현재의 규제는 리필샵의 취지를 반감시키는 결과를 낳는다고 볼 수 있다.

지금 바로, 리필 시작

명확한 규제 개혁 없이 샌드박스 제도만이 지속되고 연장될 뿐이라면 새로이 리필샵에 진출하고자 하는 스타트업들은 시범 사업의 결과가 나오기를 가만히 기다리거나, 새로운 시범 사업 신청이 열리길 기다릴 수밖에 없다. ‘한국에서는’사업을 준비하더라도 즉시 리필샵을 시작하기 어려운 이유이기도 하다.

판매자도, 이용자도 입을 모아 “실증특례는 이용 실정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다.”고 지적하고 있는 상황이다. 단순 소분 판매는 교육과 훈련을 받은 직원만으로도 충분히 운영할 수 있도록 하고, 더 다양한 화장품 리필이 허용되어야 지금 소비자들이 원하는 수준의 리필샵을 마련할 수 있게 될 것이라는 점에 이견이 없다.

맞춤형화장품 판매업이 화장품법에 규정된 후 4년, 규제특례가 승인된 후 1년이 지났으나, 후속 규제 논의는 지연되고 있다. 스타트업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속도는 그보다 훨씬 빠르다. 특히 리필샵이 지구와 다음 세대를 위한 변화라는 점에서 변화의 속도는 더욱 중요하다.

규제샌드박스 승인특례 기간인 2년이 만료되는 2023년까지 현재 1년이 채 남지 않았다. 우리 주변에서 리필샵을 흔히 볼 수 있으려면, 1년 안에 제반 논의가 끝나 규제 개혁이 마무리되어야 한다. 소관 부처의 적극적 관심과, 리필의 단순 소분판매 특성이 인정되어 조제관리사 없이 업종을 등록할 수 있도록 입법적 지원이 필요한 시점이다.

한국 전 지역에 리필샵이, 특히 화장품 리필샵 코너가 무수히 생겨나는 모습을 그려본다. 그렇게 지금 당장, 집을 나서 환경 보호를 가득 리필해 올 수 있는 날이 찾아올 수 있을까.

참조

  1. 2022년 발행된 “안전확인대상생활화학제품(소분·리필) 안전관리 가이드라인” 참고 ↩︎
  2. 1회 33%, 추가시험 9.9%, 2회 10.1%, 3회 7.2%, 4회 13.4%, 5회 23.5% ↩︎
  3. (1) 맞춤형화장품판매업 가이드라인 (2) 맞춤형화장품(소분∙리필)의 품질∙안전 및 판매장 위생관리 가이드라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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